“날짜, 관문, 그리고 짝들 제 2부”로부터의 발췌
2011년 10월 22일
자, 좋습니다. 우리는 오늘 당신과 이야기하기를 청했는데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하고 싶은 몇 가지 요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로, 날짜에 대해서인데 우리는 당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과정과 여행이 본래 끝이 없는 성질을 갖고 있으며, 당신만의 특정한 주관적인 경험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던 간에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시간의 바깥에서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신의 마음이라고 불렀던 곳의 어떤 부분에서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혹은 단지 잠재성으로서 그곳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은 언제나 출현(발생)하고 있던가 그것을 발생시켰던 존재의 기초 속으로 되돌아가 융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매우 역동적이며 복잡한 과정으로서, 당신이 모든 것을 발생시키는 그 의식과 완전한 연결 상태에 있지 않다면 이것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단어를 나열하여 신의 의식이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베일을 쓰고 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 점을 당신들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말입니다.
실제로 당신들이 이해하는 대로의 “시간”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했듯이, 시간은 시공간 연속체의 물리적 영역 내에서 일들의 위치를 나타내는 벡터의 양입니다.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형태(모양) — 높이, 깊이, 폭 — 를 가지고 있으며 경계를 설정하고 위치를 탐사하는 “위치 탐사기_locator”의 역할을 하지만, 일이나 사건들을 다른 일(사건)들과 연관 지어 배치할 수 있게 하는 편리한 모델의 기능 말고는 그 자신만의 분리된 현실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의 달력과, 시간을 표시하거나 측정하는 다른 장치들은 단지 — 여러 가지 다양한 정신적 작용들이 이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유용한 도구로서 발명해 낸 편리한 <기구들_DEVICES>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분리된 존재라고, 즉 자신의 존재가 당신이 인지하는 모든 다른 것들과 분리된 채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험의 본성 때문에 당신들은 일들을 뒤로 되돌리는(거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장치들을 장치로서 인지하는 대신, 당신은 측정하는 도구를 측정 당하는 대상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장치들과 당신이 일종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존재들에 의해 내려진 해석 양쪽 모두에 과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비록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관찰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만, 이것은 적절한 맥락 안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종종 부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일이나 사건과 그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 사이의 심오한 연결을 직접 감지하지 못한다면,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으키는 “원인”은 오직 단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인과 관계를 현상 그 자체로 돌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요점 — 즉, 우리가 이전에 진술하였던 쌍둥이 불꽃, 짝 영혼, 또는 “쌍둥이들”이란 개념은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에 기초를 두고 인간이 조작해 낸 것이라는 말에 대한 명백한 오해 — 으로 이끌어 갑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말한 것들을 아주 주의 깊게 읽지 않았고, 그들은 테라(현실의 수많은 수준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인)에서 일들이 보이는 형태에 대해서 우리가 주었던 실제적인 설명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테라에서 성적(性的)으로 생식(번식)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한 쌍_dyad이라고 불렀던 짝을 이룬 한 쌍_mated pair의 일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말하기를, 하나 이상의 장소에서 상위 영혼은 “삶들_lives”, 혹은 몸들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투사체들을 창조하는데, 그 자신 안에서 상위 영혼은 성(性)을 갖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벽하므로, 완전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다른 부분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쌍_dyad이란 한 개체가 전체와의 결합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의 기본적인 단위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창조해 낸 모든 형태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_ONE LIFE> 이외에 다른 존재의 기본적인 단위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원하는 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은 당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할 것이고 어떤 이름은 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신_God”, “창조주_the Creator”, 그리고 “근원_Source”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3차 밀도의 용어와 표현을 이해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통신은 모국어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필기사에 의해 물리적인 단어들로 번역되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말은 미국식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용하는 용어를 통해서 그녀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또한 이 글을 읽고 그녀의 글과 웹사이트를 통해서 이 통신을 받는 사람들의 자각과 인식에 의해서 또 걸러지므로, 각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의미들은 각자의 이해, 경험, 그리고 전망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우리의 독자들 중 한 사람이 최근에 모든 것이 발생하는 이 근원에 대해서 “대양(大洋)_Ocea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가 최근에 이 존재의 기반_ground(기초)을 마치 대양(大洋)처럼 물결이 이는 액체성 매질로서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필기사가 반복해서 대양(大洋)와 연관된 이미지와 말의 형태를 사용했던 것을 알아차릴 텐데, 우리 또한 전체 메시지들을 통해서 이와 비슷한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의식의 큰 대양(大洋)_the Ocean of Consciousness” 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의 요점은 이 존재의 기반_ground(기초)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나 심지어 구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되기 위해서는 경험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과 완전한 연결 — 그것이 잠깐이든, 혹은 영원한 존재 상태가 되든 — 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그 경험 자체의 본성, <또는> 그 존재의 기반의 본성을 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요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신들 중 일부는 이곳의 우리들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정도로 당신만의 “앎”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 요점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기 있는 것은 오직 베일뿐입니다. 베일이 얇아지면 당신은 우리를 당신에게 정보를 주는 원천으로 생각하고 있던 관계에서, <우리>를 당신 자신의 “앎”으로 대체하면서 더욱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존재 — 우리의 학생이 아닌 우리의 동료가 될 것입니다.
작전 테라와 연결되어 우리가 했던 모든 말과 모든 작업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이것 — 당신을 “보잘것 없는 자신_small self”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당신 자신의 존재로부터 이 부분의 현실을 촉진시켰던 방대하고 자신을 자각하는 지성으로서의 당신의 진정한 본성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지원하고 돕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그 측면을 “엘로하_eloha”(복수는 엘로힘_elohim)라고 불렀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 단어와 이름은 단지 우리들의 전망과 당신들의 전망 사이의 간격을 이어주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 이름들은 당신이 그 이름을 듣고 그것들을 당신 자신의 렌즈를 통해서 번역함으로써 그 단어들에 의미를 부여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만일 비교적 최근의 인간 역사를 되돌아 본다면 (겨우 수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양한 지식(이해력)이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면서 그것들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고안물들을 받아들이고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펼쳐지면서 재미있는 일이 한 가지 일어났습니다. 어느 주어진 시대와 환경에서 “진실”이라고 간주되었던 개념들은 고정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무엇이든 그것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것은 급진적이고, 이단적이고, 혹은 두려워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 이유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지 않을 터인데, 이 존재의 기반의 본성에 대해 확고히 굳어져 있는 사고 방식은 우리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 — 창조하는 것(이것을 우리는 창조주_Creator로 언급하는 것이 편리함을 알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말이 발현되고 있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는 활동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에게 본래부터 선하거나 악한 것은 없으며, 창조주에게는 자신의 모든 창조물이 좋다는 것 — 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들 대부분, 또는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당신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생명_One Life>의 표현으로서의 당신의 독특함과 같이 가는 개인적인 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상위 영혼에 의해서 어떤 성향과 취향, 그리고 “개성적 특성_character traits”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을 가지고 디자인되었고, 여기서 “개성_character”이란 주어진 드라마에서의 본인의 역할에 관한 것과 “본인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 본인이 접촉하는 다른 “개성들”로 부터 빨아들이는 도덕관, 양심, 그리고 가치관 등과 같은 것 — 에 관한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에는 수태, 영혼 불어넣기, 임신 상태로부터 육체적 죽음이나 완전한 변환에 이르기까지, 그 특정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포함됩니다.
당신의 기호는 당신 자신을 당신 주변의 사람들과 다르거나 같은 것으로 정의하는 방법 중 일부입니다. 당신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을 찾는데 그것은 당신에 대한 당신의 정의를 정당화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단지 모든 것들의 <있음_ISness> 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있으며>, 그 어떤 것도 다른 것들 보다 우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다른 것들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한꺼번에 수많은 의상을 입는 것처럼 자신의 창조물을 입고_wear 있는 창조주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연결 상태의 전망에서 현실을 보며,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자신 외의 다른 것들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전체 안에서 고유의 자리를 채우고 있어서 창조주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체험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체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창조주는 선호를 가지지 않습니다. 창조주는 오로지 모든 가능한 것들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도 그냥 있는 그대로 완벽합니다. 그것은 그 특정한 경험을 하기 원하는 창조주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완벽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창조주는 자신이 창조하는 모든 경험 속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당신의 고통과 당신의 기쁨은 단지 창조주를 위한 경험들이며 그 경험들을 통하여 창조주는 충족됩니다.
아직 베일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든 “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각 사람은 오직 자신에게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만 알 수 있으며, 또한 오직 그 사람이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매 순간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목적을 위해서 “부름”을 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목적을 알고 모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표현 중에 있음으로써 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고, 혹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 믿음 중 어느 것도 근거가 없는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근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저 믿음일 뿐이고, 그냥 자신의 목적을 알던 모르던 달성하기 위해 추구하는 행위를 더욱 조장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것은 모두 상위 영혼에 의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들 중 베일을 쓴 인간의 내부에서 기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베일이 찢어지고 영원한 존재 상태로서 완전한 연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연결된 상태에서 얼마나 많은 평화가 오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적절하게 파악되고, 올바른 맥락에서 보여지며, 전체 안에서 자신의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 테라로 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당신들은 완전히 연결된 상태에 다시 도달하면 이 말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들을 물리칠 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 이 말들의 옳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여행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완벽한데,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그들이 되려고 온 존재가 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역할과 전체 안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걸맞게_in character”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영화를 보고 있는데 등장인물 중 하나가 갑자기 여태까지 행동해 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거나, 혹은 더 중요하게는 그들이 출연하고 있는 전반적인 드라마 — 이야기 줄거리 — 와 맞지 않게 행동한다면,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떨떠름하게_off”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그리고 펼쳐지는 그대로 완벽한 것을 알 수 있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고 그냥 우리 할 일을 함으로써 전체 안에서의 우리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우리의 역할에는 당신들 모두와 이 대화를 하는 것도 포함되는데 당신들은 전체 안에서의 당신의 역할 때문에 우리의 이 말들을 읽도록 이끌려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짝을 찾아내는 일에 끌리거나 또는 심지어 당신의 짝과 함께 있는 상태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단지 <존재하는 모든 것_All That Is>과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전반적인 과정의 일부입니다. 그것(짝을 찾는 일)은 만물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벽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은 상위 영혼으로부터 나오며 상위 영혼이 모든 대본을 작성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창조주가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조합과 순열을 창조하여 모든 가능한 조합 및 순열을 체험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욕구에 봉사합니다. 이것은 약간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이며, 또 사실 그렇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표현 중에 있는 창조주_Creator-in-expression 뿐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하나의 주어진 창조계의 매개 변수 내에서 창조주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환영_illusion입니다.
달력은 단지 시간을 표시하거나 측정하는 도구일 뿐, 시간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것에든 날짜를 지정하는 모든 방법은 기껏해야 어림으로 짐작할 뿐이며, 단순히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 누군가의 입장에서 내려진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지구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해가 떠오르고 지는 것을 관찰해 왔으며 별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체의 물체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운동들은 분명한 주기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달력들은 그 운동들을 묘사하기 위해 발달되어 왔으며, 어떤 위치나 어떤 사건들의 발생은 한 시대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 본질적으로 타당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풍습이나 관례일 뿐이고, 또한 그것들 대부분은 곧 바늘과 숫자판도 없이 오직 단 하나의 단어 “지금_NOW”만을 나타내고 있는 시계처럼 무언가를 예측하거나 표시하는데 있어 전혀 쓸모가 없어질 것입니다.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곧”이라는 말도 대강의 근사치이며, <수십억>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어진 하나의 어림셈일 뿐입니다. 이것을 읽는 당신들 중 누구라도 주어진 달력(날짜)이나 예언에 따라 무언가가 나타나거나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지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에게 “날짜”나 “짝들”에 대한 개념들을 과거 속에 묻어 두고 완전히 “지금” 속으로 들어가라고 제안합니다.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최선을 다해서 나타나는 것에 반응하고, 이 여행이 당신이 가고 있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을 믿으십시오. 상위 영혼들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도록 창조하였으므로, 달리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당신 이외의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부분)은 거기에 대해서 전혀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웃는 것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그것은 정말로 아주 익살스러운 일입니다.)
자, 여기까지 말하였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세 번째 요점 — ”관문”에 대한 것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관문들 역시 단지 장치 혹은 기전 — 즉, 상위 영혼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창조주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작성/기록한 것들을 실행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12개의 각 관문들은 주어진 시간선 위에 있는 사람들을 새로운 창조계에서 새로운 장소로 데려갈 것입니다. 조만간 몸을 버리지 않을(죽지 않을)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들이 항상 있어 왔던 바로 그 행성 위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행성 지구로부터 나타날 지구 판들 중에 온전한 채로 웜홀을 통과하는 행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행성 지구의 각 판(버전_version)들은 새로운 창조계에서 각기 다른 장소로 출현할 것입니다. “새로운 지구”(우리가 테라라고 부르는 것)가 될 지구 판은 그녀의 3차밀도 몸을 벗어나서 4차 밀도 표현 속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4차 밀도 부정 극성의 테라의 “쌍둥이” 행성으로 갈 것이고, 우리는 그 행성에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밖에 모든 다른 “지구들”은 3차 밀도의 행성들로 나타날 것이고, 그 지구들은 각자 새로운 창조계에서 3차 밀도의 체험을 더 가지도록 대본이 쓰인 사람들을 위하여 3차 밀도의 체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시간선들은 이미 서로에게서 분리되고 있으며 여러 해 동안 그렇게 되어 왔습니다. 그 움직임은 일반적으로 분명하지 않으며, 당신의 체험에서 떠나간 사람들은 다른 방향 — 당신들의 것과 평행하지만 당신에게 감지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각 시간선이 터널(그 시간선 만의 웜홀) 속으로 들어간 것과 같으며, 일들이 각자의 결말을 향해 움직여 가면서,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시나리오들이 나타남에 따라 뒤에 남겨진 모든 추억들은 희미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작동 중이며 전반적인 움직임으로서 보여질 순 있지만, 그 움직임은 현재의 지구 상에서 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에 걸쳐서 동등하게 공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동등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체험을 떠나간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시간선 위를 걷고 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은 계속해서 당신만이 해나가야 할 여행에 대해 당신의 눈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여행을 많이 즐기고, 당신 자신에게 잘 대해주고, 나타나는 것에 반응할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평화와 명예, 그리고 축복 속에 당신을 떠납니다. 아멘 아도노이 사바요스. 우리는 천상의 주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