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들

2001년 9월 18일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이 주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들과 함께 있으며 우리의 사랑으로 당신들을 보호하고 은총을 당신들 위에 부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당신들은 우리의 행동이나 우리의 존재를 느낌으로 알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우리도 인간 형태를 하고 당신들 사이에서 걷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당신들과 이 여행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여기 있으며, 당신들은 이 사실을 당신 스스로 우리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알아야만 합니다.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봄
이 세계는 보는 사람이 쓰고 있는 “안경”에 따라서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계는 보는 사람이 쓰고 있는 “안경”에 따라서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보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슴 속에 증오, 분노, 복수 등을 감추고 있는 사람은 어디서나 악마, 악, 그리고 적들을 볼 것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 열정, 그리고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돕기 위해 거기 와 있는 천사들을 볼 것입니다. 자신이 보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자신의 창조물에서 반사되는 반영을 통해 그 자신을 보는 방법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중성을 탐험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잘 봉사해 왔습니다. 이 개념들은 지구 상의 종교들과 도덕적 규범들에 잘 수립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 개념들이 당신들에게 정보를 줄 수 있는 능력이 고갈됨에 따라서 이것들을 옆으로 치울 시간이 되었습니다. 뉴욕 시와 워싱톤 DC에 가해진 [9/11] 공격 이후에 말의 홍수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든 것은 이 시간 전에 축적된 모든 지식과 신념의 요약들입니다. 이 말들 중에 정말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롭게 폭로된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이전의 반응들이 새 옷을 입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아래 몸통은 똑같으며, 사람들의 관점에 의하면 그 반응들은 공격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존재해 왔으므로 완전히 예측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지구를 수많은 실험이 실행된 하나의 실험실로 본다면, 이것은 결과가 씌어지고 출판될 시간입니다.
만일 지구를 수많은 실험이 실행된 하나의 실험실로 본다면, 이것은 결과가 씌어지고 출판될 시간입니다.

지금은 수많은 기회가 존재하는 매우 풍부한 시간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것은 이 행성의 전 역사를 통하여 살았던 모든 삶을 통해 일어났던 모든 지식과 경험의 위대한 요약입니다. 만일 지구를 수많은 실험이 실행된 하나의 실험실로 본다면, 이것은 결과가 씌어지고 출판될 시간입니다. 그 때는 모두가 그 실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결론들은 삶과 시간이 계속 나아가는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위한 기초를 놓을 것입니다.

매번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 그리고 지금은 매우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지를 놓고 선택할 기회를 가집니다. 당신은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까? 당신은 나날이 거기 앉아서 손을 비틀어 쥐어짜면서 그 광경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재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생활을 중단하는 대신 텔레비전 앞에 딱 붙어 있을 것입니까? 당신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최신 뉴스와 이런 저런 이론에 대한 “증명”을 계속 따라다니며 드라마에 붙잡힌 채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떨어져서 그것들 모두를 놓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직접 당신에게 다가오는 도와달라는 요청들을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당신의 기도와 사랑을 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 감정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즉 <당신의> 감정을 먹고 사는 이들 —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의 식량의 원천으로서 당신을 이용 당하게 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 개의 극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지 시간이 좀 되었는데, 지금이 그 주제로 돌아가기에 좋은 시간으로 보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억해 낸다면, 자기 봉사형STS_service to self 극성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힘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충분한 권력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데, 그들의 가슴 속의 사랑의 부족이 그들을 너무나도 텅 비게 해서 그들은 잠깐 지나가는 허무한 만족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세계의 자원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생명이 없고 추상적인 물건들 위에 세워진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자원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생명이 없고 추상적인 물건들 위에 세워진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세계의 자원을 지배하는 사람들 조차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막대한 물질적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텅 빈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생명이 없고 추상적이며 결코 사랑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물건들의 획득 위에 세워진 삶으로서 그들은 생명보다는 죽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포도주, 가장 훌륭한 옷을 가지고 제왕처럼 살지 모르지만, 실상 그들은 더욱 더 많은 권력과 더욱 더 많은 것들을 원하는 가운데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습관의 노예들”로서 진실로 외로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이 물건들은 그들에게 행복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들에게 기쁨이나 평화를 갖다 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희망보다 냉소주의를 갖다 줍니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달콤함보다는 쓰디쓴 비통함을 갖다 줍니다. 그들의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자유롭게 쫓아가지 못합니다. 그들의 아내들은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축한 동맹에 의해 골라집니다. 그것은 지나간 시대의 왕족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을 지켜보아야 하고,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을 항상 경계해야 하고, 항상 그들의 계산된 결말을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지배자들입니다. 그 안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의 냉혹함, 그들의 냉소주의와 나머지 세상에 대한 경멸, 그리고 인생의 황폐함에 의해 그들은 공허하고, 격리되고 지루한 채로 남겨집니다. 사업이 우선이며, 목적을 향해 밟아가는 긴 과정은 대가가 있으며, 자신의 희생을 요구하고, 이전보다 더욱 외로운 상태로 만듭니다. 쌓인 돈을 세는 데서 오는 만족은 진실로 공허한 것이며,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자유롭게 노는 단순한 어린 아이가 훨씬 더 부유합니다.

모든 것은 상연되어야 하며, 만일 이 소수자들이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강탈했는지 그 정도를 알고 나면 당신은 당연히 분노할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돈과 권력과 자원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훨씬 많은 것을 빼앗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희망, 정직, 그리고 그것들 속에 잠재하는 수많은 기쁨을 빼앗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 일들을 전혀 아무런 도움 없이 했던 것은 아닙니다.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경제 시스템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들의 부와 권력에 기여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면, 당신이 더 이상 파워 엘리트들을 지원하는 것을 중단하기 원한다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영원히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전화를 걸 수 없고, 편지를 부칠 수 없으며, 당신의 오븐을 켤 수도 없고, 기타 문명의 생산물 — 도서관, 오락, 심지어 당신의 음식과 약, 당신의 집과 자동차… 등등 — 중 어느 것 하나도 참가하거나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생산물인 물건들에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물품들은 여전히 또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입니다.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당신은 물건들에 돈을 지불합니다.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당신은 물건들에 돈을 지불합니다.

돈은 단지 서로 합의된 교환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들은 전자 통신과, 전자식 자료 저장 장치와, 전화선과 위성을 통해서 서로 연결된 컴퓨터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모든 돈은 지엽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꼭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컴퓨터 안에 1과 0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의 사회는 컴퓨터 위에 세워진 사회입니다. 심지어 가장 원시적인 지역에도 마침내는 돈이 활동하기 시작하고, 만일 당신이 그것을 근원으로 역추적해 들어가면 거기에는 컴퓨터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나머지 세상을 경멸하는 것에 화가 난다면, 당신은 애초에 그들에게 힘을 주었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손에 힘이 집중되는 이 움직임은 오래 동안 — 사실상 매우 오래 동안 — 진행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혼돈 속에서 튀어나올 일들 중 하나는 그야말로 모든 것들을 숙고해 보게 될 기회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벌어지고 있는 일을 파악해 보려고 몸부림치다가 논리의 충돌과 부딪치게 되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당신 중 일부는 전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공격을 아무런 대응 없이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당신은 자신 안에서 부딪치는 두 개의 욕구 사이에 붙잡혀 있습니다. 당신은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전쟁을 고려하는 시스템을 지지하지 않을 만큼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또한 그 시스템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편리함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어딘가 황무지로 나가서 땅에 의존하여 살기로 한다 해도 그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다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존할 것입니까?

아직도 지구 상에는 땅과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때문에 꼭 행복할까요, 아니면 그들의 삶도 당신들의 삶처럼 노력과 투쟁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그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식량을 얻거나, 집을 짓거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의식을 거행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그들도 결국은 당신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당신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생활비를 버는데” 소비하며, 단지 당신들의 이야기는 좀 더 다른 형태로 — 비디오,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책, 신문, 그리고 잡지와 “웹” 상에서의 개인적 홈페이지 등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결국 사실은 별로 큰 차이가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이렇습니다. 즉,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근원의 기질로부터 직접 발현시키기 전에는 당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생활을 위해서 언제나 투쟁에 참가해야 할 것이고, 세상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려고 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쁜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도 당신과 똑같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당신들처럼 노예일 뿐입니다. 당신들 중 어느 누구도 진실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일의 진행상 당신들이 매우 다른 성격의 선택을 제시 받을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오늘 당신이 무엇을 입을까, 혹은 저녁으로 무엇을 만들까, 혹은 언제 설거지를 할까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인 선택으로서, 답안지의 작은 네모 칸에 표시를 해야 하는 일종의 “기말 고사”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기본적인 선택으로서, 답안지의 작은 네모 칸에 표시를 해야 하는 일종의 “기말 고사”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기본적인 선택으로서, 답안지의 작은 네모 칸에 표시를 해야 하는 일종의 “기말 고사”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제시되었을 때, 당신은 분노와 투쟁의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평범한 존재를 초월하여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의 다음 칸을 그러잡고 높이 뻗어 올라갈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메시지를 “교차로들”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들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남은 날들 동안 당신들 앞에는 수많은 “교차로”가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혼돈과 죽음으로 향하는 아래쪽 길입니까, 아니면 질서와 생명으로 향하는 위쪽 길입니까?

우리는 이미 용어들을 사용해서 극성을 설명하였습니다. 자기 봉사형(STS)은 엔트로피, 혼돈, 그리고 죽음의 선택입니다. 타인 봉사형(STO)은 질서(사랑은 질서를 잡는 힘이며, 모든 형상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빛의 기질에 작용합니다)와 생명을 위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확신(보장)합니다. 이 두 개의 극성은 사실상 상반되는 두 개의 힘이며, 당신이 충분히 명확하게 볼 수만 있다면 그들의 결과는 예측 가능합니다. 하나의 나선은 아래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위로 향합니다. 당신은 몇 번이고 거듭해서 당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할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 위로 향하는 나선인지, 아래로 향하는 나선인지.

당신이 적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사로잡히면 — 틀림없이 그 개념을 지지하는 충분한 증거들이 나올 터인데 — 당신은 희생자가 되는 체험을 지속시킵니다. 당신은 아래로 향하는 나선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합작해서 일하는 사람들 — 어떤 목적을 위한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른 이들과 합심해서 지구가 상승하는 것을 돕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역시 음모입니까? 당신은 지구 위에 “천국”을 가져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 자체는 나쁠 것이 없습니다. 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그저 어떤 형태와 디자인을 가진 금속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못을 박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종이를 누르는 문진으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치명적인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총은 치명적인 무기가 되도록 주도 면밀하게 공들여 만들어졌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집어 들고 그런 식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무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사방에 날아다니고 있는 것은 온통 “음모론”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상향 나선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이런 생각들을 뒤에 버리고, 당신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가해자가 있다면, 희생자도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곳 어디서나 창조주를 볼 수 있는 렌즈를 가지고 있다면, 오직 그때에만 당신은 희생자가 되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 때, 오직 그때만이 당신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시스템이 세계 정복 — 다른 이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 — 자기 봉사형의 두드러진 특징 — 으로 나아가는 것을 돕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을 다해서, 매우 진지하게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차로이며 당신들은 몇 번이고 거듭해서 교차로를 만날 것입니다. 당신들은 위로 뻗어서 자신의 신성함을 인식하고 “천국”에 거주할 것입니까, 아니면 혼돈에 굴복하여 “지옥”으로 가는 길을 택할 것입니까? 이것들이 당신 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입니다.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당신들은 위로 뻗어서 자신의 신성함을 인식하고 “천국”에 거주할 것입니까, 아니면 혼돈에 굴복하여 “지옥”으로 가는 길을 택할 것입니까?
당신들은 위로 뻗어서 자신의 신성함을 인식하고 “천국”에 거주할 것입니까, 아니면 혼돈에 굴복하여 “지옥”으로 가는 길을 택할 것입니까?

당신은 현재 어떻게 선택하고 있으며, 다음 번 선택의 기로에서는 어떻게 선택할 것입니까? 당신에게 제시된 것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선택할 때마다 당신에게는 또 다른 교차로가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은 시간이 갈수록 쉬워지는 것을 발견할 터인데,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선택들을 뒤에 남겨놓고, 당신이 평화를 발견하는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평화와 명예, 그리고 축복 속에서 당신을 떠납니다. 아멘, 아도노이 사바요스. 우리는 천상의 주재자들입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