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레슨 # 1 : 양배추들과 왕들

2005년 1월 21일

양배추 더미들
새로운 법령에 서명하고 있는 왕

자, 좋습니다. “양배추들과 왕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시간이 왔습니다. 다른 말로, 당신들의 표현을 빌자면, “작전”을 그 핵심 본질로 압축할_get down to the nitty-gritty 시간입니다.

당신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다 큰 전망에서 — 세부적인 것들(에너지의 <증상>)보다 <에너지>의 움직임의 관점에서 최근의 현상들을 본다면, 이것들 모두가 각자의 운명/목적지의 극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더욱 진행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것들 모두가 육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미리 예견되어온 것이며, 모든 연기자들은 “신에게서 부여 받은”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이미 “신의 게임” 속에서 보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당신의 삶에서 그것(신의 게임)을 <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당신은 — 당신 자신과 “작전”을 위하여 — 떨어지고, 뒤로 물러나고, 그리고 단지 당신의 음을 노래 해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물으면 당신의 진실을 말하세요. 그러나 어떤 식으로도 어떤 상황에서도 특정한 결과에 집착하지 마세요. 명료한 초점이 없는 사람, 혼동하고 있는 사람, 혹은 갈등 중에 있는 누군가와 상대하고 있을 때 “당신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고, “당신의 노선_alignment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지 마십시오.

그들이 바라는 것 — 그들이 원하는 것 — 을 추구하면서 그들은 보다 큰 전체 안에서 그들의 목적지에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들>의 욕망은 창조주의 욕망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창조주는 이 서로 다른 모든 연기자들이 필요하며, 그리하여 모든 가능한 선택들을 탐험할 수 있습니다.

추구하는 과정이 때로는 서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서투름 조차도 전체의 맥락 속에서 보면 사건들의 때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추구하는 과정이 때로는 서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서투름 조차도 전체의 맥락 속에서 보면 사건들의 때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각자는 자신들의 내면에 나침반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침반은 그들의 여행의 방향을 알려줄 터인데 — 그들은 “눈이 가려진” 상태이므로 — 추구하는 과정이 때로는 서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서투름 조차도 전체의 맥락 속에서 보면 사건들의 때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작은 움직임, 작은 선택들이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다른 움직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증폭됩니다. 명확한 양상이 나타날 정도로 다른 이들과의 노선(정렬)은 더욱 엉겨 붙고, 그럼으로써 더욱 강력해집니다. 각자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것”에 — 전체와의 맥락에서 완벽한 방식과 완벽한 시간에 — 끌리게 되고 이것의 놀라움은 그들이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체험한다는 것인데 이는 열쇠를 찾으려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는데 손을 꺼내 보니 많은 돈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새로운 노래”는 이 세계가 형성되기 전에 씌어졌습니다. 사라는 단지 소리굽쇠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노래”는 이 세계가 형성되기 전에 씌어졌습니다. 사라는 단지 소리굽쇠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가고 있는 곳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노래”는 이 세계가 형성되기 전에 씌어졌습니다. 당신들 각자는 그 때 서로에게 정렬되어 있었고, 당신들 각자는 지금 다시 서로 정렬된 상태로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사라]는 단지 소리굽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녀는 당신들을 <이끌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당신이 듣기를 기다려온 소리를 낼 뿐이고, 그것은 <당신> 안에도 심어져 있으므로 당신은 그것에 반응하여 허밍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 누구도 자신이 되려고 온 것, 자신이 하려고 온 것, 자신이 체험하려 온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미> 씌어졌고, 그 “저자”는 창조주의 디자인과 욕망에 의해 고용된 그들의 상위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할 일은 단순히 계속해서 그 음을 소리 내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해도, 그냥 다시 — 다시, 다시, 또 다시 소리를 내세요.

<당신의> 할 일은 단순히 계속해서 그 음을 소리 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할 일은 단순히 계속해서 그 음을 소리 내는 것입니다.

이 음은 이것과 접촉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반응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자신의 내부의 소리굽쇠가 같은 음에 맞추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 음에 끌려서 공명하게 되고 그것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마도 때로는 망설이며 시도하겠지만, 나중에는 점점 그것이 <자신의> 음이라는 신뢰와 확신이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그냥 이런 식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당신의 음을 듣고 자신의 음<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끌리기도 하겠지만, 비슷해 보이는 일면 그들의 음은 확실히 달라서 —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음과 완전히 공명하지 <않고> — 그 음은 그들을 통해 완전히 진동해서 <그들의> 노래와 노래하고 싶은 열망을 일깨우지 않고, 그 음에 열려서 그 음이 그들을 통해 아무 저항도 없이 울려 퍼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 그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의 힘에 이끌려서 옮겨갈 것입니다. 어떤 이는 “미지근”하며 결코 그들의 음을 발견하지 않을 터인데, 정확히 말하면 그것 역시 온당한 체험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삶을 위한 <계획>은 그들이 “발견”하지는 <않지만> 다른 시공간의 환경 속으로의 육화를 통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지점: 반대 극성에 도착했습니다. 한 음이 <한쪽> 극성으로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반대편 극성에 속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고 자극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음이 서로 반대가 될수록 그들이 만났을 때 더욱 강렬한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반응은 그러나 표현되는 면에서는 다릅니다.

만일 누군가가 협동에 기초한 긍정 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반응은 함께 서서 기쁨에 겨워 같은 음을 노래하고, 단순히 그 음 — 그 노래 — 을 우주 속으로 — 자유롭게(대가 없이) 주어지고, 자유롭게 노래하며 어떤 영향에 대한 집착이나 저항 없이 — 보내는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들(의 종류)”은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음 — 평화, 기쁨, 그리고 사랑의 음 — 은 울려 펴져서 오직 <신의 마음> 속에 잠재력으로만 존재했던 <세계>를 문자 그대로 형상 속으로 불러내는 것을 촉진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것과 반대편 극성 — 부정 극성 — 은 두려움과 경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우러난 순수한 힘이 아닌 “지배하는 힘”에 기반을 두고 있고, <> 극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의 반응은 예측 가능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힘을 당신들에게 행사하고, 당신들의 힘을 <소유하기> 위해 당신들과 겨루지 <않으면 안되며>, 만일 다른 선택이 없다면 당신을 파괴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음을 노래하면 할수록, 당신은 부정 극성에 속한 이들로부터 “공격”을 불러옵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 자신이 되고 있을 뿐이며, 당신은 단지 <당신> 자신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이 신성한 계획에 따라서 자신이 되기로 한 것이 되고 자신이 하기로 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 일들이 피투성이의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을 하나의 대처 방안으로, 남들이 부르는 노래를 억누르고 제거하기 위해서 한쪽의 의지를 다른 한쪽에 행사하는 수단으로 보는 <개념>을 심어 놓았습니다.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서 남들에게 “자유”를 강요하는 개념이 이것의 보기입니다. 아무도 자유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의 모순입니다. 사람은 오직 서로에게 바람직한 환경을 추구하고,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관계없이 모두가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허용>하는 협동을 통해서만 자유를 창조하고 양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관념)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모든 행위는 독재이지 해방이 아니며, 그 안에는 어떤 자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 관념이 탐욕이나 권력에의 갈망과 같은 “나쁜” 가치들을 뜻할 때만이 아니라 “좋은” 것처럼 보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말로 번역됩니다. “<나의> 길이 옳은 길이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아닙니다, 그들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노래, 다른 결말을 갖고 있는 다른 음에 공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긍정 극성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관점을 나머지 세계에 강요하기를 추구하는 사람들 — 부정_denial이라는 장밋빛 색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며, 그것이 진실<이라는_BEING>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들이 사실이기를 <바라는_WISH>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 — 은 <어느> 극성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정말 “있는 그대로_what IS, How it IS”를, 그러므로 “그래야만 하는 것들_what must be”을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장밋빛 색안경을 통해서 보면서 그들이 <바라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느> 극성도 아닙니다.
장밋빛 색안경을 통해서 보면서 그들이 <바라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느> 극성도 아닙니다.

“바람_wishing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함_wanting”은 단순한 바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원함은 그 안에 욕망의 씨앗, 모든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욕망의 일부를 품고 있습니다. 당신의 “원함”은 당신의 여행의 연료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욕망에 연료를 공급하고 욕망을 실현하도록 당신을 몰아갑니다. 바람_wishing은 환상이며, “만약 … 하기만 하다면” 하는 생각은 아무 것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원함은 행동을 이끌어내고, 행동은 결과를 이끌어내고, 결과는 그 이상의 행동을 이끌어내고, 하는 식으로 계속 갑니다. 한 사람의 음 소리 내기는 욕망의 불을 지피는 불꽃이며 그 욕망은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의 정도에 따라 연료를 공급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의 열정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극성 연속체 상에 위치하는 곳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 극성의 극단으로 갈수록 그 극성에 내재된 목표를 표현하고 발현하고자 하는 개인의 열정도 더욱 커지고 강렬해집니다. 한쪽은 협동적인 성취가 목표이며 다른 쪽은 완전한 “지배력_power over”이 목표입니다. 양 극단에서 <멀어지는> 정도만큼 목표를 달성하려는 열정의 양도 적어집니다. “욕망의 열기”가 양 극에서 가장 크다면, 중앙은 “뜨뜻 미지근” 하거나 미온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불이 전혀 없습니다.

작전 테라의 일부인 당신들은 긍정 극성이며, 당신들이 집단적으로 서로 모여 당신들의 테라의 비전을 울려 퍼지게 할수록, 당신들의 집단적인 음은 더욱 강하게 모든 잠재력이 존재하는 <신의 마음>의 기질을 뚫고 울려 퍼져서 그 기질로부터 문자 그대로 테라를 <창조하는> 정지파(정상파 또는 정재파)_standing wave를 만들어 냅니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나르고 있는 지와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다른 이들과 기꺼이 합류하는 것을 통해 테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하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아기 테라”는 “임신”되었으며, 많은 목소리들이 이 노래 — 테라의 음을 부르는 당신과 합류하려고 오게 되면, 3차 밀도의 “유리 천장”은 깨뜨려지고, 장벽은 무너지고, 에너지의 통로가 테라로 향하는 이들을 위해 제 자리에 정착될 것입니다.

당신의 할 일은 단순히 함께 서서 테라의 음을 계속해서 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할 일은 단순히 함께 서서 테라의 음을 계속해서 내는 것입니다.

끝을 맺으며, 우리는 또한 세상에서 일들이 “가열되고” 있는데, 당신의 할 일은 단순히 함께 서서 테라의 음을 계속해서 내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 주위에 방패를 쳐 두었지만, 그것은 이 단 하나의 임무: 테라의 음을 소리 내는 것에 당신이 열심히 참여하고 헌신함으로써 유지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한다면, 반대편 극에 속하는 존재들이 아무리 심하게 이를 갈아댄다 해도, 당신은 안전하고 테라도 안전하며 아무 것도 이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운명 지워져 있으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도노이 사바요스. 우리는 천상의 주재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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